<빈, 내겐 너무 완벽한>
p.32
30여 년 후 페스트가 또다시 덮쳤을 때 빈의 방역 담당 관리들과 의사들은 첫 번째 대유행 때 저질렀던 오류를 되새기면서 적극 대처해 피해 규모를 크게 줄였다. 비를 맞고 선 페스트조일레를 보면서 그들을 생각했다. 인간은 얼마나 무지하며 무력한가. 그러면서도 또 얼마나 지혜로우며 용감한가. 삶은 때로 얼마나 허망하며 또 얼마나 질긴 것인가.
p.53
왕가의 수집품은 대부분 작품을 발주한 사람의 요구와 취향에 맞추어 제작하거나 매입한 예술품이다. 반면 제체시온의 전시품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내적 지향과 감정을 표현해 세상에 내놓은 것이었다. 군주정과 공화정, 중세의 귀족과 신흥 시민계급, 정치적 종교적 인습과 자유로운 예술정신, 세기말 빈에서는 이런 것들이 뒤섞이면서 충돌했다. 만약 빈에서 단 하나의 미술관에만 갈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제체시온을 선택할 것이다. 그곳에서 만난 작품들은 크든 작든 창조자인 예술가의 상상력과 철학과 개성을 보여주었고 내 마음에 저마다 다른 감정을 일으켰다. 종교과 이념과 인습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 그게 바로 예술 아니겠는가.
p.58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현실의 장벽에 봉착하면 선택지가 둘 있다. 그 사회를 탈출하거나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는 것이다. 나폴레옹의 몰락은 군주정의 부활로 이어졌고 유럽 사회는 진보의 희망이 사라진 시기를 맞았다. 봉건적 신분제도와 낡은 특권이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민중은 현실을 외면하고 사소하지만 확실한 일상사의 즐거움을 맛보면서 그 시대를 견뎠다. 비더마이어 시대 전시실에 실내장식 가구 공예품 그림을 보면서 그것을 만든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반동의 시간도 예외가 아니다. 좌절감이 옅어지고,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가 쌓이고, 대중의 이성이 눈 뜨고, 보통 사람들의 마음에 용기가 번지면, 어느 날 갑자기 역사의 물결이 밀려와 진보의 모든 배를 한꺼번에 띄워 올린다. 그런 때가 오기까지 작고 확실한 즐거움에 몸을 맡기고 삶을 이어가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비더마이어 시대 전시실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퇴행과 압제의 어둠 속에도 빛이 완전히 꺼지는 법은 없다. 그렇게 믿으며 삶을 이어가면 새로운 시대를 볼 수 있다.' 내가 거기서 본 것은 좌절과 도피가 아니었다. 질긴 희망과 포기하지 않는 기다림이었다.
p.93
하지만 빈이라고 상처가 없는 건 아니다. 수많은 역사의 상흔을 덮어 버리는 데 완벽하게 성공해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치적 후진성은 시씨 황후의 아름다움과 바로크 궁전의 화려함으로 가렸다. 독일과 합병해 자의 반 타의 반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질러 놓고 서도 나치 잔재 청산 작업은 하지 않은 채 영세중립국으로 국제사회에 인정을 받았다. 유엔 사무총장을 연임한 쿠르트 발트하임은 나치 돌격대 가입과 독일군 중위 복무 사실이 드러나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지만 무난히 대통령에 뽑혔다. 독일은 모든 도시 모든 장소에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되새기는 공간과 시설을 만들어 두었지만 빈에서는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으면 볼 수 없다. 그라벤의 삼위일체상도 페스트의 참극을 모르는 여행자에게는 그저 멋지게 금박을 두른 종교적 조형물일 따름이다.
그렇지만 빈이 싫지는 않았다. 편하진 않아도 좋았다. 기회가 생기면 또 가고 싶다. 빈 사람들이 역사의 그늘과 상처를 지우는 방법이 괜찮아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빈은 가치 있는 그 무엇을 이룬 사람을 돋보이게 만드는 방식으로 그 일을 해냈다.
<부다페스트, 슬픈데도 명랑한>
p.114
부다페스트의 화려함은 헝가리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열등감의 표현이 있는지도 모른다. 역사의 상처를 감쪽같이 지워버린 빈과 달리 부다페스트는 그 모든 것을 내놓고 보여줌으로써 여행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증언하는 초대형 기억공간을 조성한 베를린 말고는 부다페스트만큼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을 적극 홍보하는 도시를 찾아보기 어렵다. 부다페스트에서 반드시 그런 것을 챙겨야 하는 건 아니지만, 사연을 알면 부다페스트가 더 정겹게 안겨 오는 느낌이 들 것이다.
p.143
강변의 구두는 유대인들의 가슴 미어지는 참극과 헝가리 사람들의 지워버리고 싶은 범죄행위를 되살린다. 거기서 유대인을 학살한 범인은 독일이 아니라 헝가리 사람들이었다. 독일 군대가 소련군에게 밀려 부다페스트를 떠나자 나치당에 헝가리 버전인 '화살십자당(Nyilaskeresztes Part)'의 살라시(Szalasi Ferenc)가 권력을 장악하고 1944년 11월부터 소련군이 들어온 1945년 2월까지 다뉴브 양편 둑에서 1만 명이 넘는 유대인을 총살했다. 헝가리인은 테러하우스에서는 피해자로, 다뉴브 강변에서는 가해자로 남아 있었다. 안내 책자에 이곳을 볼거리로 소개한 부다페스트 관광청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과거사 정리와 관련해 원칙과 일관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서.
p.162
나는 부다페스트를 다른 어떤 도시보다 좋아한다. 그 도시는 스스로를 믿으며 시련을 이겨내고 가고자 하는 곳으로 꿋꿋하게 나아가는 사람 같았다. 1천 년 전 말을 타고 거기 왔던 머저르의 후예들이 지난 150여년 동안 무엇을 성취했는지 보여주었다. 나는 부다페스트에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보면서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맛보았다. 부다페스트는 슬프면서 명랑한 도시였다. 별로 가진 게 없는데도 대단한 자신감을 내뿜었다. 오늘의 만족보다 내일에 대한 기대가 큰 도시였다. 나는 그런 사람 그런 도시가 좋다.
<프라하, 뭘 해도 괜찮을 듯한>
p.185
하누슈라는 사람이 15세기에 만들었다는 시계는 눈금판이 해와 달의 위치를 비롯한 천문 정보를 담고 있어서 '천문시계'라고 하는데 정기적으로 잠깐씩 움직인다. 해골이 줄을 당기고, 모래시계가 뒤집히고, 위쪽의 조그만 창문으로 예수의 열두 제자 미니어처가 지나가고, 닭이 울고, 다시 멈추기까지 1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 대단한 구경거리는 아니었다. 고장 나 멈춰버린 시계를 전동장치로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보면 크게 신기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함께하면 없는 재미도 생기는 법, 천문시계 자체보다 그걸 보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더 재밌었다. 시계가 움직이기 전부터 슬금슬금 모여든 관광객들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서서 한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때를 제일 좋아한다는 소매치기를 경계하느라 한 손은 카메라, 다른 손은 가방을 꼭 움켜쥔채로.
p.221
카프카는 <변신> <유형지에서> <심판> <성> 같은 작품을 삼십 대에 썼다. 그는 자신의 글이 인간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가 되기를 바랐다. 카프카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가 자신의 의도를 초지일관 밀고 나갔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위대한 작품을 남겼으나 외로움과 고통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던 사람, 그 사람이 머물렀다는 것 말고는 아무 특별함도 없는 곳에서 지구 곳곳에서 온 관광객들이 해맑게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카프카가 옳았다. 우리의 삶과 우리가 만든 세상은 역설과 부조리로 가득하다.
<드레스덴, 부활의 기적을 이룬>
p.248
드레스덴 폭격 50주년인데도 독일 정부는 희생자 추모 행사를 하지 않았고 텔레비전 방송은 짤막한 뉴스만 내보냈다. 기사를 보여주며 물어보았더니 독일 친구가 나즈막이 말했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내놓고 말하지 않는 사건이야. 우린 그보다 더 못된 짓을 훨씬 많이 했거든. 홀로코스트만 있었던 게 아니야. 코번트리(Coventry) 같은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어. 혹시라도 그 사건 가지고 막 떠드는 사람 만나면 조심해야 해. 올드나치거나 네오나치일지 모르니까." 코번트리는 잉글랜드 내륙의 작은 도시이다. 재규어를 비롯한 고급 승용차 공장이 있어서 전쟁 때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1940년 11월 14일 밤 독일 공군이 코번트리를 폭격해 수천 명의 민간인을 살상했다. 코번트리 시민들은 그때 완전히 무너진 중세 성당을 그 상태로 보존하고 바로 옆에 새 성당을 지었다. 드레스덴은 '가해자의 몸에 남은 상흔'이었다. 독일 사람들은 그 상흔을 남몰래 만질 뿐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 했다.
p.258
집은 건축주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다. 종교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건축양식은 건축기술의 발전, 활용할 수 있는 건축자재의 변화, 건축주가 동원할 수 있는 재정의 규모 등 여러 요소의 영향을 받는다. 건축주의 철학과 욕망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로마제국 시대에 지은 교회는 무섭지 않다. 아테네 도심 골목의 오래된 정교회들은 아담하고 소박하고 정겹다. 원래 성당이었던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웅장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중세 유럽의 대세였던 고딕 양식 성당들은 그렇지 않다. 높고 날카로운 첨탑과 장중한 스테인드글라스로 '경외심' 또는 '공포감'을 강요한다. 고딕 양식은 가톨릭교회가 세속권력과 결탁하거나 스스로 세속권력을 능가하는 권력이었던 시대의 지배적 건축양식이다. 그들이 그런 집을 지은 것은 민중이 그곳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복종하기를 원해서였을 것이다.
p.265
첨단 기술을 적용한 재건축을 비판한 이들이 있었다. 원래의 그 교회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근본적 구조 결함을 처음부터 안고 있던 건물을 원래대로 복원할 수는 없었다. 기술적으로 불합리한 데다 현행 건축법 위반이기도 해서 매사에 완벽함을 추구하는 독일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독일의 전문가들은 독일인다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가장 먼저 지하 17미터까지 땅을 파면서 모든 잔해를 건져내고 지층을 새로 조사했다. 건물의 기초를 다시 놓고 기둥과 지붕을 철골 콘크리트로 만들었으며 겉에 얇은 사암을 입혀 겉보기에는 원래 교회와 똑같게 했다. 폭탄과 열 폭풍을 견디고 테라스 보수공사 차출을 모면한 8천여 개의 돌들이 원래 어디 있었는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알아내어 비교적 온전한 3천 5백여 개를 하중을 덜 받는 곳에 넣었다. 사암은 철분을 품고 있어서 오래되면 검붉게 변한다. 시간이 더 흐르면 새 돌과 옛 돌을 구분할 수 없게 되겠지만 지금은 바로 알아볼 수 있을만큼 차이가 난다.
p.312
성모교회의 부활은 인간의 두 얼굴과 인류의 두 미래에 관한 이야기인지 모른다. 성모교회는 우리 모두 저마다의 내면에 지킬과 하이드를 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이기성 배타성 공격성 잔인함 독선 맹목성에 사로잡혀 드레스덴을 죽였고 이타심 너그러움 동정심 관용의 정신을 회복해 되살렸다. 성모교회의 부활은 루터파 기독교인들끼리 이루어낸 종교적 사건이 아니다. 드레스덴을 폭격했던 미국과 영국의 시민들, 기업, 참전군인의 가족들, 희생자의 후손과 이웃, 세계의 시민들이 자유와 다양성과 관용의 정신이 깃든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투사해 이룬 문명사적 사건이다. 나는 부활한 성모교회에서 촛불을 올리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소원이 실현되기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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