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8
"그러니까 어른이 되면서 신발 끈 묶는 일도 차차 쉬워질거야."
그러자 현성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들은 빨리 할 수 있고, 어린이들은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분명히 나는 얼굴이 빨개졌을 것이다. 지금도 할 수는 있는데. 아까 현성이가 분명히 '연습했다'고 했는데. 어린이는 나중에만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지금도 할 수 있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p.45
나는 어린이의 품위를 지켜 주는 품위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어린이 앞에서만 그러면 연기가 들통나기 쉬우니까 평소에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감사를 자주 표현하고, 사려 깊은 말을 하고, 사회 예절을 지키는 사람. 세상이 혼란하고 떠들썩할 때일수록 더 많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마음만으로 되지 않으니 나도 보고 배우고 싶다. 좋은 친구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하나 기웃거리는 요즘이다.
p.91
어린이를 만드는 건 어린이 자신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는 즐거운 추억과 성취뿐 아니라 상처와 흉터도 들어간다.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어린이의 것이다. 남과 다른 점뿐 아니라 남과 비슷한 점도, 심지어 남과 똑같은 점도 어린이 고유의 것이다. 개성을 '고유성'으로 바꾸어 생각하면서 나는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 순간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간다고 할 때, '다양하다'는 사실상 '무한하다'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p.191
어른들 사이에도 한쪽은 반말을 쓰고 한쪽은 존댓말을 쓰는 상황이 펼쳐질 때가 있다. 상사와 부하 직원, 시어머니와 며느리, 선배와 후배처럼. 이들의 대화에서 감정을 편하게,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쪽일까? 반말을 하는 쪽이다. "생일이다?"의 물음표 부분에 해당하는 '분위기'도 반말을 하는 쪽은 전달할 수 있다. 존댓말을 하는 쪽은 자기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상대가 표현한 감정을 알아차리고 대응한다. 인류학자 김현경이 <사람, 장소, 환대>에서 존지법의 체계는 인간곤계가 원활하게 굴러가는데 필요한 감정 노동을 '아랫사람' 몫으로 떠넘기는 문화와 연결되어 있다"라고 지적한 대로다.
어른들은 흔히 "애들을 위해서 말을 가린다"라고 하는데 어린이야말로 말조심을 한다. 존댓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서열을 파악하고 어휘를 고르고 감정을 조절하는 일이다. 경험은 어른보다 적은데 책임은 어른보다 많이 져야 한다. 우리 어린이들이 어른들 보아 가며 말하느라 참 고생이 많다.
p.236
어린이는 정치적인 존재다. 어린이와 정치를 연결하는 게 불편하다면, 아마 정치가 어린이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 보기에도 민망하고 호가 나는 장면들을 어린이들에게 보이기 싫은 것이다. 그런 문제일수록 어린이들에게 설명하기도 어렵다. 어린이는 그런 어른들의 모습까지도 볼 것이다. 달아날 곳이 없다. 이 봄이 지나고 다시 만났을 때 은규가 쏟아 낼 질문들 때문에 벌써부터 긴장이 된다. 봄이라고 졸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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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라는 세계 - 김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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